숨은 신 - 루시앙 골드만 저/ 송기형 역/ 연구사
왜 라신의 비극이 그토록 내 취향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난 고등학생 시절 파스칼의 『팡세』에 빠져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나의 취향을 피력했었고, 지금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변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골드만이 라신과 파스칼, 루카치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비극적 세계관의 모든 것이 나를 매료한다. 더불어 작년에 문피아에서 연재될 때 그렇게 열광했던 『레드 세인트』와 『루나틱 언밸런스』가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놀라울 정도로 ㅡ 상당히 노골적인 수준으로 ㅡ 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정말 취향은 어디 가질 않는구나. 지금은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을 읽고 있다. 이걸 읽고 나면 번역되지 않은 『숨은 신』의 뒷부분을 마저 읽어야지. 뭐랄까, 읽는 순서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비전공자이니 기호와 흥미와 변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100709 파괴된 사나이

둘.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알프레드 베스터의 『The Demolished Man』이었는데, 정작 영화의 영어 제목은 《Man of Vendetta》였다. 관객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주는 부분이다. 단적으로 말해 '복수'라는 주제는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오로라 공주》에서처럼 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계획된 엄중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도 아니요, 《테이큰》에서처럼 딸을 구출하기 위해 완전한 무법자가 되어 통쾌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주영수(김명민)가 최병철(엄기준)의 집을 찾아가는 결말부에서는 대단한 액션도 스펙타클도 없다. 분노에 찬 아버지의 통쾌한 복수를 기대한 관객은 생각보다 시시한 결말에 맥이 빠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복수보다는 한 남자가 믿음을 잃고, 이를 다시 회복하는 과정을 그리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주영수는 딸 혜린을 잃음으로써 목사로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고, 아내를 떠나보내고,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버렸다. 혜린의 생존이 확인된 이후에도 아직 그에게 잃을 것이 남아 있었던 양 모든 것이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리며, 시의 적절하게 다가오는 듯 보였던 공권력으로부터의 도움의 손길도 바로 눈앞에서 차단되고 만다. 반면에 영수와 대치되는 캐릭터로, 그의 아내인 민경은 시종일관 혜린의 생존에 대한 믿음과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수한다. 어떤 통찰력이나 직감의 힘을 빌려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유괴 사건과 딸의 사건 간의 관계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살아있는 혜린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도 그녀이다. 살아있는 딸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백 번 천 번 죽을 수 있다고 말하며, 실제로 자의든 타의든 딸의 구출을 위해 목숨을 잃는 그녀는 신앙에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나 다름없다. 그녀와 유괴범을 포함한 모든 상황이 영수의 믿음을 시험한다. 말을 다시 하게 된 혜린이 아빠에게 물어오는 것도 다름 아닌 믿음의 확인이다. 이렇게 해서 관객은 어떻게 한 남자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되찾는지를 보게 된다.
셋. 김명민의 연기는 확실히 관객을 끌어당긴다. 그의 매력은 자로 잰 듯 반듯한 인물보다는 상처입고 일그러진 인물을 연기할 때 더욱 살아나는 것 같다. 그런데 시나리오만 보면 딱 작년에 개봉한 《이태원 살인사건》 꼴 나기 좋았다는 게 솔직한 감상이다. 이제 좀 괜찮은 작품에 출연할 때가 되지 않았나. 대작까지는 아니라도 '김명민 없었으면 망했을 영화' 소리 안 들을 만한 작품에.
김명민의 경우보다 안타까운 것은 엄기준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최병철이라는 인물에게서 캐릭터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놈 목소리》도 아닌데, 병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 살인자의 또렷한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목소리뿐이다. 그의 동기는 한 마디로 설명된다. '호사 취미를 가졌음.' 그의 성격도 모호하다. 그는 상황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을 바꾸면서도 잔인성은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잔인성은 피와 살점이 튀는 장면 자체가 아니라 병철이 살인을 딱히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필요한 만큼 이를 저지른다는 점이다. 이런 부분을 조명했다면 좀더 입체적인 살인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넷. 예전에 《테이큰》을 보고 남의 나라(프랑스)까지 가서 딸 찾겠다고 여러 사람 잡고 정부 요원한테 총 쏘고 도망간 리암 니슨이 딸 찾고 금의환향하는 장면에서 "말도 안 돼! 프랑스 정부가 물로 보이냐!"라고 외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괴된 사나이》는 적어도 이런 헐리웃식 해피엔딩은 피해갔다. 나름대로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해야하나.
다섯. 나도 슈렉 보고 싶다.
100316 Love Never Dies

오페라하우스 사건 이후 10년. 팬텀은 지리 모녀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의 기괴한 상상력을 구현한 코니 아일랜드를 개장한다. 그동안 지리 모녀는 팬텀을 위해 봉사해왔고, 특히 팬텀을 숭배하는 멕 지리는 그의 관심과 인정을 갈망한다. 하지만 우리 팬텀은 덕심만 한 차원 업그레이드되어 실물 크기의 크리스틴 로봇을 가지고 놀고 있다. (웨스트엔드에서는 크리스틴 로봇이 말썽을 일으켜 프리뷰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었다고.) 팬텀은 ‘금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크리스틴 다애 초청 공연’을 기획하는데, 라울의 노름빚을 갚기 위해 돈에 팔려온 크리스틴에게 지리 모녀는 불안을 느끼고, 라울은 술주정하고, 아들 구스타브는 물색 모르고 돌아다닌다. 구스타브랑 놀아주다가 열 살배기 소년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견한 팬텀은 ― 올레! 네가 내 아들이로구나! ― 라울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크리스틴이 다시 한 번 음악의 천사를 위해 노래한다면 영원히 그녀와 아들 곁에서 떠나는 것으로. 그녀는 결국 팬텀을 선택하고 라울은 떠나고 두 사람이 환희에 젖어있는 사이 절망에 빠진 멕은 구스타브를 데리고 사라진다. 뒤늦게 쫓아가 멕을 달래지만 실수로 발사된 총에 맞은 크리스틴은 아빠는 어디갔냐는 구스타브에게 한 마디 하고 쓰러진다 ― 여기 진짜 아빠가 있잖니. 크리스틴은 죽고 두 부자는 서로 마주보다가 손잡고 사라지는 것으로 그랜드 피날레(짝짝짝).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소설을 기반으로 했다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이야기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게 잘못일까. 적어도 내가 읽은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재치 있고 스토리텔링에 능수능란한 작가였는데 어떻게 이런 한국 아침 드라마 같은 식상한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지. 원작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왠지 뮤지컬 버전의 대본을 썼다는 벤 엘튼에게 모든 비난을 돌리고 싶은 이 심정은 뭘까. 뮤지컬과 원작 사이에 케빈 레이널즈의 영화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알렉상드르 뒤마의 원작 사이만큼의 차이가 있을 거라는 데에 10원쯤 걸겠다. -_-;;;
음악에 ALW의 우려먹기 내공이 녹아들어 전작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Angel of Music>, <Little Lotte...>, <Twisted every way...>, <Final Lair> 같은 전작의 마이너 넘버를 연상케하는 멜로디 라인이 복선으로 등장하지만, 배경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코니 아일랜드로 옮겨간 만큼 락이나 보드빌 스타일의 곡도 있고 굉장히 '미국 뮤지컬'스럽다. 전작만큼 히트할 넘버가 있을지는 다 듣지 못해서 아직은 판단 불가. 일단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ALW,
Love Never Dies,
The Phantom of the Opera,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음악
올해 읽은 베스트 도서 : Making Money
올해를 그냥 보내긴 섭섭해서 이번에도 한 해 중 읽은 베스트 도서를 꼽아보기로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의외로 신간을 많이 챙겨 보지는 못했다. 재독한 작품도 꽤 있고. 기억나는 텍스트를 꼽아보자면 다시 읽은 진산의 『사천당문』 1*2부, 이번에 멀티 문학상을 수상한 콜린님의 『절망의 구』, 무시무시한 인문학적 소양으로 무장한 스토리텔러 댄 시먼스의 『히페리온』, '뮤지컬 원작 소설'이라는 첫인상을 완전히 깨부수고 정치적 메타포와 사정 없는 독설로 루나양을 후려친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위키드』 정도 되겠다. 그리고 암울했던 2009년을 그나마 웃으며 보낼 수 있게 해주었던 테리 프래쳇의 《디스크월드》 시리즈. 30권이 넘어가는 방대한 시리즈를 처음부터 볼 자신이 없어서 무작위로 골라 보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건 채 열 권이 안 되지만 언젠가 다 읽을 날이 오겠지.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Making Money』를 올해 읽은 베스트 도서로 꼽았다.
『Going Postal』에 등장했던 전직 사기꾼 모이스트 폰 립빅이 다시 주인공으로 나온다. 전작에서 사형수->금빛 수트의 우체국장으로 변신한 모이스트는 백 년 가까이 버려져 있던 우체국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앙크-모포크의 인기인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체국이 정상화되자 젖먹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그의 크리미널 마인드는 슬슬 반기를 들기 시작하고, 때마침 우리의 총독님은 그에게 위험천만한(?) 은행 일을 제안한다! '저는 곧 결혼할 몸이어요!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지요!'라고 발을 빼던 그는 어느새 사기꾼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인 입방정 + 크리미널 마인드 콤보로 인해 위험의 중심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전작에서 우표의 발명으로 디스크월드의 체신 사업에 혁신을 불러일으킨 그는, 우표가 공공연히 화폐 대용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에 착안해 종이 화폐를 고안한다. 그러나 대대로 은행을 소유해온 앙크-모포크의 거부 집안 래비쉬 가문의 음모와 시민들의 금 본위 사고방식의 저항도 만만치 않고, 설상가상으로 사기꾼이었던 모이스트의 과거를 아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테리 프래쳇의 장점으로 현란한 패러디와 배꼽 빠지는 슬랩 스틱 코미디, 천진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보니 소재를 가공하는 능수능란함도 빼놓을 수 없겠다. 기초적인 경제학과 약간의 역사적 사실 ㅡ 어쨌든 현실과 닮은꼴이니까 ㅡ 을 소재로 이렇게 코믹한 글이 나올 수 있다니! 코믹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이대로라면 테리 프래쳇이 살아있는 한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소재가 떨어지는 일 없이 백 권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참으로 바람직하군.) 게다가 '판타지 세계에서 돈 만드는 이야기'가 뜬금없이 느껴지지도 않는데(주1), 『마법의 색』에서 두송이꽃이 처음 앙크-모포크에 발을 들였을 때 개념 없이 금화를 펑펑 써대는 장면이라든지, 『Interesting Times』에서 아가티안 제국으로 넘어간 린스윈드가 처음 지폐를 대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장면, 전작에서 모이스트가 우표를 고안해내는 과정 등이 이미 이 작품을 예고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작품에 대해서는 은근히 상 복이 박한 테리 프래쳇은 이 작품으로 2008년 로커스 상을 받았다고.
머리를 잘 굴리고 혓바닥은 더 잘 놀리는 모이스트 폰 립빅은 디스크월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치고는 운이 억세게 좋은 편인데, 전작에 비하면 역경도 별로 없고 어찌 되었든 종국에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는 점이 약간 아쉽긴 하다. 그렇다고 운수대길 만사형통 영지발전물에서 가끔 나오는, 명령 한 번에 돈을 뚝딱 만들어 유통시키는 장면과 비교하면 섭섭하다. 주인공에게 역경이 별로 없다고는 해도, 작가가 충분한 고려 없이 몇 문장으로 설명해 버리고 넘어가는 것과 디테일을 묘사하면서도 '왜 심각해지시나? 한 번 웃을 타이밍이라네'라고 눈을 한 번 찡긋하며 코믹함으로 정리해주는 것을 도매금으로 묶어서 취급할 수야 있나. 그래도 그 점이 못내 아쉬웠던 것은 왠지 모이스트가 디스크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작에서 로드 베티나리는 그에게 우체국을 되살리라는 임무를 내렸고 그는 성공했다. 이번에는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좀 굴려보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로드께서는 다음엔 국세청에 보내볼까 고려중이시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아무리 테리 프래쳇이라도 참신함을 살리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게다가 모이스트는 크리미널 마인드를 잠재워주는 위험한 누님과 결혼할 예비 신랑이니까(...)
아, 그리고 끝으로 한 마디 더. 앙크-모포크에 로드 베티나리의 팬이 많다는 것은 매우 흡족한 사실이다. (주2) (앙크-모포크의 유일한 투표권자로서) 1인 1표제 민주주의의 강력한 수호자이시며 차갑고 명석한 두뇌와 강렬한 존재감의 소유자이신 우리 총독님은 능력도 좋으시지. :) 뱃속에 야망을 키우고 있는 자들은 많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앙크-모포크를 집어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로드 베티나리 그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로드 베티나리 워너비'들이 정신병동 하나를 다 채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이미 로드의 빠슨이가 되어 버린 루나양에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이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는 심경으로 로드를 보고 있음을 확실히 깨달아버렸다고나 할까. 어쨌든 암살자와 강도, 머리 빈 영웅들이 활보하는 앙크-모포크에서 오래오래 살아남아 전제정치를 펼쳐주시기 바란다(...)
1) 많은 사람이 루나양이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재테크 또는 경영을 공부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가, 판타지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해했다.
2) 누구씨를 위해 덧붙여 둔다. 언젠가 제레미 아이언스가 로드 베티나리로 출연한 적이 있다.

테리 프래쳇의 장점으로 현란한 패러디와 배꼽 빠지는 슬랩 스틱 코미디, 천진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을 보니 소재를 가공하는 능수능란함도 빼놓을 수 없겠다. 기초적인 경제학과 약간의 역사적 사실 ㅡ 어쨌든 현실과 닮은꼴이니까 ㅡ 을 소재로 이렇게 코믹한 글이 나올 수 있다니! 코믹할 뿐만 아니라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이대로라면 테리 프래쳇이 살아있는 한 디스크월드 시리즈는 소재가 떨어지는 일 없이 백 권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참으로 바람직하군.) 게다가 '판타지 세계에서 돈 만드는 이야기'가 뜬금없이 느껴지지도 않는데(주1), 『마법의 색』에서 두송이꽃이 처음 앙크-모포크에 발을 들였을 때 개념 없이 금화를 펑펑 써대는 장면이라든지, 『Interesting Times』에서 아가티안 제국으로 넘어간 린스윈드가 처음 지폐를 대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장면, 전작에서 모이스트가 우표를 고안해내는 과정 등이 이미 이 작품을 예고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작품에 대해서는 은근히 상 복이 박한 테리 프래쳇은 이 작품으로 2008년 로커스 상을 받았다고.
머리를 잘 굴리고 혓바닥은 더 잘 놀리는 모이스트 폰 립빅은 디스크월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치고는 운이 억세게 좋은 편인데, 전작에 비하면 역경도 별로 없고 어찌 되었든 종국에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는 점이 약간 아쉽긴 하다. 그렇다고 운수대길 만사형통 영지발전물에서 가끔 나오는, 명령 한 번에 돈을 뚝딱 만들어 유통시키는 장면과 비교하면 섭섭하다. 주인공에게 역경이 별로 없다고는 해도, 작가가 충분한 고려 없이 몇 문장으로 설명해 버리고 넘어가는 것과 디테일을 묘사하면서도 '왜 심각해지시나? 한 번 웃을 타이밍이라네'라고 눈을 한 번 찡긋하며 코믹함으로 정리해주는 것을 도매금으로 묶어서 취급할 수야 있나. 그래도 그 점이 못내 아쉬웠던 것은 왠지 모이스트가 디스크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작에서 로드 베티나리는 그에게 우체국을 되살리라는 임무를 내렸고 그는 성공했다. 이번에는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좀 굴려보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로드께서는 다음엔 국세청에 보내볼까 고려중이시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아무리 테리 프래쳇이라도 참신함을 살리기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 게다가 모이스트는 크리미널 마인드를 잠재워주는 위험한 누님과 결혼할 예비 신랑이니까(...)
아, 그리고 끝으로 한 마디 더. 앙크-모포크에 로드 베티나리의 팬이 많다는 것은 매우 흡족한 사실이다. (주2) (앙크-모포크의 유일한 투표권자로서) 1인 1표제 민주주의의 강력한 수호자이시며 차갑고 명석한 두뇌와 강렬한 존재감의 소유자이신 우리 총독님은 능력도 좋으시지. :) 뱃속에 야망을 키우고 있는 자들은 많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앙크-모포크를 집어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로드 베티나리 그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로드 베티나리 워너비'들이 정신병동 하나를 다 채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이미 로드의 빠슨이가 되어 버린 루나양에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이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는 심경으로 로드를 보고 있음을 확실히 깨달아버렸다고나 할까. 어쨌든 암살자와 강도, 머리 빈 영웅들이 활보하는 앙크-모포크에서 오래오래 살아남아 전제정치를 펼쳐주시기 바란다(...)
1) 많은 사람이 루나양이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재테크 또는 경영을 공부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가, 판타지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해했다.
2) 누구씨를 위해 덧붙여 둔다. 언젠가 제레미 아이언스가 로드 베티나리로 출연한 적이 있다.




















